구름과 노을의 안식처


미소녀 동물원의 숲에서 애니메이션을 본다는 것 애니메이션 감상


 미소녀 동물원의 숲에서 애니메이션을 본다는 것. 저는 이를 쉽게 말하자면 '바보'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 두 가지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바보'란, 쌍방의 소통이 있느냐 없느냐에서 결정되며, '바보'의 본질은 동물원의 동물들과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 간의 소통의 일방향성에 있습니다. 그저 그들이 보여주는 콘텐츠와 즐거움, 쾌락을 시각적으로 섭취하기만 하면 그 뿐인 것들 말이죠.

 최근 트렌디한 모에 애니메이션들이 주로 취하는 포지션은 '(미소녀) 동물원'입니다. 이미 모에 캐릭터로서 완성된 그(녀)들은 유저들에게 소화당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이상의 목적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콘텐츠를 섭취하고 소화하는 '우리들'이 그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들이 '동물원'에서 귀여운 '동물'로 있는 것을 원할 뿐이지 동물원을 탈출하여 스스로 자립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일본에서 크게 대두된 '아이돌 문화'의 성장과도 맞물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종의 '흐름'입니다. 좋고 나쁜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TVA의 이러한 역할은 시대와 사회가 '엔터테인먼트'에 요구하는 것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 됩니다. 과거 애니메이션이 주목 받고 (또 주목 받아야 했고) 소위 '명작'이 쏟아지는 부흥기 땐 그러하지 않았으면 애니 업계는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좀 더 도전적이고, 창의적이며 그럴싸한 내용과 사상, 메시지도 포함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부흥기를 거쳐 상업적으로 쇠퇴기를 맞이한 TVA에 있어서 이것은 반대로 마이너가 되었죠. 굶주리고 절실할 때 철학을 외치는 것에서 여유가 있고 배부를 때 철학을 외치는 것으로요.

 하지만 '절대' 라는 건 없습니다. 그럼에도 어느 제작사는 뚝심있게 자신이 만들고 싶은 '애니메이션'을 만들려 하고 있고 여전히 상상력이 넘치며 캐릭터가 살아 숨쉬는 물건도 있습니다. 요는 콘텐츠를 향유하는 우리 자신이 어떤 스탠스로 그것들을 바라보고 또 섭취할지를 결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일상에 지친 사람에게 애니메이션에서까지 진지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요. 반드시 그 누군가에겐 (모에로 점철된) 파라다이스가 필요한 법입니다. 행복한 '바보'가 되느냐, 고뇌의 '철학자'가 되느냐. 어쩌면 지금의 TVA는 이런 가운데서도 다양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역동적인 한 때인지도 모르겠군요.

 잡설이 서두로 길게 오는 바람에 장황해졌습니다. 이번 분기에서 대충 보고 있는 애니메이션 몇 가지를 언급할 명분이 뭘까 생각하다가 그만...(웃음)


 1. 블렌드 S
: '남성' 캐릭터가 등장하긴 합니다만, 지난 10년 전만해도 '모에?'라고 물음표를 띄웠던 요소들을 '모에!'라고 느낌표를 붙여서 아예 콘셉트 캐릭터로 밀어 붙이고 있는 무시무시한, 전형적인 '미소녀 동물원' 애니메이션입니다. 캐릭터 디자인과 작화의 퀄리티가 좋기 때문에 그야말로 보는 이의 행복회로를 녹여버려 바보를 만들고 마는 무서운 녀석이지요. 저도 어찌되었든 덕후인지라 보면서 흐믓했습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그리고 아실 분들은 아실 그 성우, '타네자키 아츠미' 씨가 메인 캐릭터 중 한 명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미 이번 분기 <마법사의 신부>에서 원톱 주역으로 출연하시기도 하는 등 빛의 세계에서도 연기력을 인정받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니 참...좋네요!


 2. Fate/Apocrypha
: 과거 폐기된 프로젝트를 애니화로 바꿔서 만든 페이트 시리즈 중 하나라고 듣긴 했습니다만, 페그오를 안 한 제 입장에선 잔느가 참 귀여워서 매화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제가 봤을 때 페이트 시리즈가 갖는, '성배 전쟁', '성배' 의 소재는 그 한계점이 명확한 소재이기 때문에 이미 거진 정해진 '결론'보다는 이처럼 과정을 이리저리 꾸미며 영령에 치중했던 것이 페이트 시리즈가 지금까지도 인지도와 수명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이라고 봅니다. 곧 <페이트 헤븐즈 필 1부>가 국내에서도 개봉하는데 정말로 감회가 새롭습니다...


 3. 네토쥬의 스스메 (이 게임 폐인이 사는 법)
: 이번 분기의 조용한 다크 호스이지요. 그리고 모에와 미소녀 동물원이 판치는 지금 이 시기이기 때문에 '소수파'로서 이 오소독스하며 케케묵은 소재의 애니메가 주목받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와 다른 것은 주인공이 남자에서 여자로 바뀌었고, 히키코모리에서 '30세 자발적인 니트'로 성격이 바뀌었다는 것 정도일까요. 실은 이것들이 과거 애니메이션의 향유층의, 지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도 봅니다. 줄거리나 핵심 사건, 이벤트 자체는 정말로 별 것 없고 단순하지요. 하지만 캐릭터 - 특히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이 퍽 잘 됩니다. 저도 주인공이 30세 니트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재미있게 보진 못했을 거에요. (웃음)


 4. Just Because!
: 드라마 전문 제작사인 P.A. Works의 '트루 티어즈', '글라스립'을 떠올리게 만들면서도 한층 더 고등학생들의 현실감을 짙게 드러내는 오리지널 청춘 드라마입니다. 요즘 애니답지 않게 상당히 절제된 감정 연출과 간접적인 표현 등은 최근 애니들과 비교했을 때 가장 이질적으로도 느껴지게 만듭니다. 그만큼 감정이나 표현의 제어 장치에 브레이크가 없었던 최근 애니메들에게 너무 익숙해진 탓이기도 합니다만, (웃음) 이와 같은 장르의, 이와 같은 분위기를 선호하시는 분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녀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번 분기 가장 기대하면서 보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고, 매 순간의 인물들의 행동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쉽게 재단할 수 없는 이 청춘 드라마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네요.. 이 애니를 보면서 갈증이 좀 풀린, 혹은 무엇에 굶주렸는지 깨달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제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을 너무도 상기시키는 바람에, 특히 하루토에게 감정이입을 너무 많이 해버렸어요...ㅜㅜ 부디 제발 하즈키와 잘 되었으면!!


[이 커플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결사의 항전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5. 보석의 나라
: 매화 놀라면서 보고 있는 물건입니다. '보석'의 캐릭터화와 3D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가 절묘하게 결합되었으면서도, 시청자가 쉽게 예상하기 어려운 전개와 세계관, 설정들이 얽혀서 인간의 상상력은 또 한 번 놀랍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애니메이션입니다. 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쿠로사와 토모요 씨의 자연스럽고 때론 거친, 천연덕스러운 연기는 이런 캐릭터와 정말로 찰떡궁합이지 않나 싶어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궁합 말이죠. 매화 포스의 연기를 보고 듣는 맛도 일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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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은 P.A. Works의 <사쿠라 퀘스트>에 대해 포스팅을 할까 생각했는데 이건 따로 포스팅을 하기로 하고, 우선 이번 분기에 매주 보고 있는 녀석들부터 훑어봤습니다. 서두에 적은 애니메이션의 '미소녀 동물원'에 관한 글은 실은 <사쿠라 퀘스트>의 포스팅과 더 어울립니다만 쓰다보니 형편상 ...(주륵)

 하운나래.

덧글

  • 잉여로운나날 2017/11/14 18:10 # 삭제 답글

    이번 분기는 마음에 드는 애니를 파고 들기보단 다른 사람들의 평을 보면서 관망하는 중입니다(그동안 무절제하게 쌓아놓기만 한 컨텐츠가 방대한지라..-_-) . 그럼에도 첫인상이 괜찮은 물건이 몇개 있었는데 그게 여태 잘 나간다니 보지 않은 제가 되려 흡족하네요ㅋ

    미소녀 동물원 현상은 역사가 그리 오래된 건 아니지만 2000년대부턴 트렌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2000년대 말까진 비동물원 작품들이 주로 화제의 대상이었는데 2009년경 케이온의 폭발적인 성공 이후론 대세가 변했죠.

    전 미소녀 동물원의 팬은 아닙니다만 거기서만 줄 수 있는 재미가 분명 존재한다고 봅니다. 다만 기발한 창의력으로 유별난 재미를 주는 작품(케모노 프렌즈, 케이온!, 아리아...)과 남의 성공을 안일하게 복제만 하려는 작품(개인적으론 블렌드 S가 여기에 속한다고 봅니다) 사이의 갭이 크고, 후자는 서로가 등장인물과 그림체만 바뀐 닮은 꼴 붕어빵 같아 차이를 설명하기 힘들더군요. 그래서 '미소녀 동물원'이 실은 '미소녀 박제물' 같아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운나래님 말대로 결국은 선택의 문제이지만 저로선 그 폭이 매번 줄어드는 것 같아 착잡하네요. 그래도 내년부턴 넷플릭스나 아마존 같은 거대 스트리밍 배급사라 일본 애니에 적극 투자를 유치할 계획이라니 매우 기대가 됩니다!
  • 하운나래 2017/11/14 20:11 #

    댓글 감사합니다!

    박제물까지 언급해주셔서 저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좋은 보충 감사합니다 (__)

    언급은 안 했습니다만 저도 그 폭이 줄어드는 것을 체감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넷플릭스나 아마존의 새로운 바람이 어떤 자극을 줄지 상당히 궁금하네요.
  • 더스크 2017/11/14 19:12 # 답글

    저스트 비코우즈는 뭔가 그림이 짭 타와와 같은 느낌이 들어서 영 미묘하네요
    게다가 그마저도 불안정하고;;
  • 하운나래 2017/11/14 20:14 #

    실제로 히무라 센세가 캐러 원안을 맡으셨다보니...다만 애니 제작진이 일정 퀄리티를 유지하지 못하는 거 같아 이 점은 저도 퍽 아쉽더라고요. 역시 자본이 부족한 것이...ㅜㅜ
  • 후아드 2017/11/14 23:17 # 삭제 답글

    확실히 언젠가부터 백화점이나 동물원마냥 미소녀 캐릭터들을 세트로 여러 만들어서 캐릭터빨로만 쇼부치려는 것 같은 애니들이 많이 생기긴 했다는 점에서 아이돌 위주로만 가고있는 우리나라나 일본 대중음악 시장하고 비슷한 느낌이 드네요. 다행히 나름대로 의미있는 시도를 하려고 하거나 캐릭터성만이 아닌 애니메이션으로서의 퀄리티도 챙기려고 하는 작품들도 있기는 한데 그런 작품들이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지만 시장 상황상 그리 될지는 모르겠네요.
  • 하운나래 2017/11/14 23:43 #

    댓글 감사합니다!

    언더그라운드 부류였던 서브 컬쳐도 이제는 이런데, 대중 문화 콘텐츠도 흐름은 마찬가지겠지요...세상에는 다양한 즐거움의 방식이 있는데, 아무래도 지금은 창작과 시장 상업성이 맞물려 있기에 크리에이터 입장에선 트렌드를 따라갈 수밖엔 없을 거 같아요. 콘텐츠를 향유하는 우리네 입장에선 역시 다양한 것들이 나와줬으면 하는데 말이죠.
  • 구구리 2017/11/15 02:11 # 삭제 답글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게 보고있는게 just because 입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연애물이고 분위기와 캐릭터들도 좋은데
    스케줄이 펑크나버려서 아쉽다고 생각하네요...작화도 불안정하고요. 그밖에 쿠지스나,보석의 나라,소녀 종말 여행,블렌드s등은 기대를 하지않았음에도 아직까진 아주 좋았습니다.
    물론 기대를 했던 혈계전선과 마법사의 신부는 역시나였고요.

    개인적으로 미소녀동물원을 싫어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있는쪽이
    더 다양성이 있어서 좋고요...문제라면 옛날과 다르게 좀 많아졌고
    스토리보단 상업적 접근이 더 많아졌다고 봐야하겠죠.
    그게 나쁜게 아닌 오히려 돈이 되어야 한다는건 알지만 한쪽만 늘어나는걸 바라는건 아닙니다. 줄었다지만 그래도 작년보단 올해 후반기가 볼만한건 늘어났다는 느낌이라 좋네요.
  • 하운나래 2017/11/15 08:30 # 답글

    댓글 감사합니다!

    전반적으로 공감이 갑니다. 저도 오히려 시청자 입장에선, 아니 모에 덕후 입장에선 더 즐길 거리가 많아진 것 같아요. (웃음) 다만 이제 좀 진지하게 볼 수 있는 애니메 자체는 아무래도 줄어든 감이 없잖아 있긴 합니다. 대체로 이런 부류는 극장판으로 거진 빠지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요...
    다만 분명한 건 2쿨 이상의 본격적인 스케일의 애니메는 그 수가 절대적으로 줄어들어서 TVA의 역할 자체가 축소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지요. 혹자들은 일본 애니 업계가 망했다고 예전부터 입을 모아오긴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JB와 같은 오리지날 애니메가 여전히 등장하려 하는 곳이기도 하니 긍정적으로 지켜보고 싶습니다.
  • 검은월광 2017/11/15 13:58 # 답글

    미소녀 동물원은 귀여운 건 좋은데 귀여움을 시청자한테 강제하는 것 같아요.
  • 하운나래 2017/11/15 20:56 #

    댓글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시청자들의 취향, 모에 포인트를 저격하려는 목적이 강하니까요. 반대로 저격되지 않으면 부담스러울 수 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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